
[광수종국] 수면 시간과 사랑의 상관관계
w. 꾹꾹이
한국인의 평균 수면시간은 평일 기준 6.7 시간, 주말으로는 7.4 시간이다. 혹자는 그조차 많은 시간이라며 깨어있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그건 엄연히 건강에 위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일 뿐이다. 예를 들어, OECD 통계 자료를 보면 세계 평균 수면시간인 8시간 22분과 한국인들의 수면시간은 약 2시간이나 차이가 나는 꼴이다. 그 뿐인가? 만 26세 이상의 수면 시간은 공기관의 적절한 조사에 기반해 7시간에서 9시간 사이를 권장하고 있다. 따라서, 6시간 미만 혹은 10시간 초과의 수면은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최적의 상태로 분류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타당성과 정당성에 의거하더라도, 크게는 사회 작게는 한 집단이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그를 인용한 논설문 혹은 행동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큰 단점이다. 그게 핵심이었다.
...아이, 씨. 미치겠다.
오늘부터 모 대학의 조교로 부임하게 된 대학원생 이광수가 아침부터 머리를 쥐어뜯게 된 이유가 바로 그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시계에 두 눈을 고정시킨 채, 양손엔 잘 관리한 티가 나는 갈색 머리카락을 잔뜩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일단 진정해 보자, 다시 시간을 보는 거야. 이게 꿈일 수도 있어! 헛된 희망을 품고 다시 시계를 보았지만 여전히 시침은 8을 가리키고 있었다. ..8시 28분, 교수님께서 출근을 허락하며 말해주신 출근시간은 9시 정각이었다.
개처럼 달려야겠다.
오른손에는 에코백, 왼손엔 구겨진 코트를 들고 말 그대로 개같이 달렸다. 버스를 기다리기엔 5분조차 아까웠고, 축축하게 젖어서 물까지 떨어지는 머리카락으로 버스를 탔다가 받을 눈총을 고려한 결과값이었다. 결과적으로 8분 정도는 내리 팔자에도 없는 달리기를 해야 했으나, 8시 50분이라는 시간을 보니 제정신이든 아니든 간에 뛰어야 하는 게 맞았다는 걸 인정한다. 첫날부터 지각하면 인성이 얼마나 뛰어난 교수님이던 간에 게으른 놈으로 기억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불과 하루 전의 자신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대학 졸업 후 일절 연락도 없던 놈이 다짜고짜 전화해서 나간 것까진 좋았다. 그래, 다 좋았는데! 지가 헤어졌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새벽 4시까지 그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는 것이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멱을 잡고 질질 짰다.
내가 질린 걸까? 야, 말 좀 해봐. 나 못생겼냐?
어, X나 못생겼어.
그으래, 나 못생긴 건 알았으니까.. 그보다 나 좀 도와주라. 나 헤어지면 안 돼.
왜? 빚이라도 져서 그러는 거야?
아니, 난 그 사람 없인..... 흑. 광수야아-
사실 광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랑 하나에 그렇게 목숨을 거는 것도 그렇고, 이 세상에 새로 사귈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구 연인을 잊지 못해서 주변에 폐까지 끼친단 말인가? 5년 10년 사귀었으면 또 몰라, 1에서 2년 사귄 상대에게 이별 통보를 받았다고 그렇게 아플 일일까? 이미 5년 전에 첫 연애를 대판 싸우고 날려버린 광수에겐 연애란 아직 턱없고도 뒷맛이 나쁜 것이라고 인식되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적은 많았지만 진정하게 호감을 느낀 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술을 홀짝이며 대화를 빙자한 고해성사를 들어주었지만, 이제 아예 취했는지 그의 코트를 쥐어뜯으며 울고 있었다. 눈물과 콧물에 뒤덮힌 코트를 보고있자니 모든 게 해탈해져서 말릴 생각도 안 하고 씁쓸히 보고만 있는 광수였다.
덕분에 광수는 아끼는 코트 하나를 콧물범벅으로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콧물 때문만은 아니었다.
흐어엉, 광수야. 나 그 누나 없이는 못 살아. 아니, 안 살아!
너 많이 취했어, 이제 좀 들어가.
광수야, 진짜, 그러면 안 된다아아. 나 진짜 그 사람 없인 못 살아. 나 죽을지도 몰라. ...욱, 우웨엑!
어? 야!! 이 미친 새끼야!
콧물은 고사하고도 시원하게 토를 갈겨준 덕분이었다. 광수가 두 달 전에 시켜서 이틀 전 겨우 도착한, 아르바이트비로 사기엔 아주, 매우, 턱없이 비싼 코트에. 광수는 피눈물을 흘리며 나무랐지만 그런다고 강을 건넌 코트가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다.
아이 , 야. 내가 좋은 사람 소개시켜 줄게!
됐거든? 빨랫값이나 내놔.
앗, 야. 야! 그럼 내가 너 도와줄게, 어? 너 좋아하는 사람 생겼을때 도와줄게!
퍽이나 도와주겠다, 지 연애도 말아먹은 놈이.
나 남 연애엔 완전 박사야 박사. 어?
됐으니까 계좌이체 해 놔라.
야!!
사실 아직 계좌이체 못 받았다. 일어나자 마자 메시지로 보내온 것이 땀을 뻘뻘 흘리는 이모티콘일 것도 예상했다. 사실은 기대도 안 했다. 술에 꼴아서 택시에 태워져 보내져서, 사실 제대로 집에 도착한 것만 해도 기적일 상태였기 때문이다. 옷은 쉰내가 너무 많이 나서 그 놈 택시 태워주러 가는 길에 버렸다. 갈색 코트에 귤 소스 냄새가 제대로 밴 것이 무척 끔찍했다. 네 시간 정도 지난 지금도 그 냄새만 떠올리면 속이 울렁거린다.
아무튼 시점을 바꿔서, 광수는 전날의 자신을 저주하며 빠르게 뛰고 있었다. 씨이, 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개가 된다. 월월.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며칠 뒤엔 개가 될 거라는 걸 광수 자신도 알고 있었다- 190이 넘는 장신인지라 캠퍼스 밖에서도 안에서도 그를 의식하는 시선이 많았다. 만화처럼 우아하거나 미친 듯이 빠르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 갓 태어난 새끼 기린마냥 비틀비틀 달리고 있기 때문에 그런 듯 했지만, 아무튼 시선은 시선이었다.
헉!
그 때였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남자와 부딛힌 것은. 55, 56, 57... 쉼없이 흘러가는 분침에 손목시계만 바라보다가 발이 삐끗한 것이 화근이었다. 색 빠진 빨간 타일이 깔린 바닥 위로 뻐억,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남자와 뒤엉켜 한데 쓰러졌다. 상당히 깊숙한 곳까지 뛰어 들어와 인적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누군가 봤다면 주먹다짐으로 오해할 수 있을 만큼의 소리였다. 주먹다짐 속에서의 광수는 갑자기 뛰어와 멀쩡히 가는 남자에게 몸통박치기를 날린, 시비 터는 걸 즐기는 거구의 싸움꾼일 터였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까만 후드를 입고도 그 안에 까만 모자를 또 쓴 그 남자는 잘 빠진 다리가 훤한, 반바지 차림이었다. 편한 운동화와 쥐색 운동가방 때문인지, 다른 전공이라기엔 상당히 좋아 보이는 몸매 때문인지, 보통의 체육계 학생 같은 인상을 줬다. 모자 아래로 살짝 찡그린 표정과 밝은 다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본의 아니게 학생에게까지 폐를 끼치고 말았다는 생각에 광수는 평소보다 더 빨리 멘탈이 깨져가고 있었다. 빠각, 빠각. 머릿속에서 쿠크다스가 여덟 개는 부숴진 기분이었다. 날벼락 맞은 것은 저쪽인데도 자신이 더 당황해 안절부절 못하는 광수가 황당한지 남자의 표정이 볼 만 했다.
아니.. 정말 죄송해요! 제가 좀 늦어서요.
....
학생에게 폐를 끼치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다치신 곳은 없으시죠?
....
진짜 죄송해요, 나중에 만나면 커피 살게요!!
90도로 인사한 광수는 다시 발에 불이 나도록 뛰고 있었다.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을 거라고 지레짐작하며, 나중에 체교과에서 그를 찾아봐야 쓰겠다고 생각하며. 아침 댓바람부터 모르는 사람에게 몸통박치기를 당한 그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며.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광수는 시간도 급하고 사과는 해야 하고, 앞으로에 대한 걱정도 겹쳤기 때문에 정신이 없을 대로 없을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한 사과는
아니정말죄송해요제가좀늦어서요학생에게해를끼치려고한건아니었어요다치신곳은없으시죠??
정도가 되겠으나, 그마저도 그 뒤의 말은 너무 빨라서 알아듣지도 못했기에 쓸모도 없는 말이 되었다. 그저 광수가 지나간 뒤, 쌩하니 달려가는 광수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는 남자만 남았을 뿐이다.
허망하게도, 캠퍼스를 헤매느라 10분은 더 늦어버렸음에도 교수님은 허허 웃는 얼굴로 괜찮다고 말했을 뿐이다. 게다가 특히 신경쓰지도 않는 눈치였다. 광수가 조교로 들어가게 된 담당 교수님은 경영학과를 맡고 계셨는데, 코가 무척 크고 안경알 없는 굵은 테 안경을 쓴 것이 특징이었다. 장난기 많고 수다스러운 성격 때문에 인수인계 과정에서 여러 번 경로를 탈선해서 애먹긴 했지만, 다른 걸 막론하고라도 빡빡하지 않은 교수님이라는 것 자체가 광수는 마음에 들었다.
산책이나 하고 오겠다며 터덜터덜 나간 교수님의 뒤로, 건네받은 수업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노라니 아까 부딛힌 사람에 대한 미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늦는 건 물론 잘못이지만 혼나지도 않을 걸 너무 급하게 뛰어서 폐를 끼쳤다 싶기도 했다. 그리고 지각을 안 했으면 말을 않는다. 늦었지 않은가?
그보다 누구일까? 몸이 좋으니 체육 계열 과목을 듣고 있겠지? 새내기로는 안 보이니 휴학하고 이번에 다시 돌아온 학생인가 보다. 머리카락이 부스스한 게 푸들같은 느낌이 났는데 염색을 했나? 귀염성 있다, 잘 어울린다. 한번쯤은 쓰다듬어보고 싶, 아니. 이게 아니지. 부딛힌 뒤 다친 건 아니겠지? 오늘은 간단한 인수인계랑 앞으로 할 일만 알려준다고 했으니 짬이 많을 것이다. 커피를 사겠다는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겠지? 절대로 그 남자를 다시 한 번 보고싶다는 건 아니다. 그 남자가 취향이긴 하지만.. 매끈한 다리와 몸매가 마음에 안 들었느냐면 그것도 아니지만.. 놀란 그 눈이 안 귀여워 보였던 것도.....
..그만하자.
오늘은 3시간 내에 끝났다. 강의실에서 출석을 부르다가 몇 번 이름을 더듬는 실수가 있긴 했지만 대체로 잘 끝난 것 같다는 생각에 광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학생들이 부르는 별명인- 왕코 교수님은 날에 따라 근무시간은 3시간 사이에서 6시간 사이라는 것을 의례적으로 설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할 정도로 순조로웠다. 새 조교를 반가워하는 눈치의 학생들이 강의가 끝나자 마자 다가와 종알종알 얘기를 쏟아냈기 때문에 약간 피곤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교수님, 학생 하나를 찾고 싶은데요.
학생이 얼마나 많은데 하나를 찾아?
제가 오늘 출근하다가 누를 끼쳐 버려서요. 혹시 아시는 분이면 도와주셨으면 해서..
그래 인마, 내가 좀 인맥이 넓긴 하지. 말만 해!
갈색 머리에 몸이 무척 좋은 남성분 이었는데.. 이름은 모르겠어요.
그런 사람이 한둘인 줄 아니? 아. 체교과 명철인가? 실음과 용석인가.. 학생인 거 확실하지?
음.. 그런 것 같은데요.
그러면 그런거지 그런 것 같은 건 또 뭐야?
정 모르겠으면 체교과에 한번 가 봐, 그 쪽에 워낙 몸 좋은 애들이 많아야지. 아마 지금쯤 그 쪽도 수업 끝났을걸?
진짜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잘 가고, 내일은 아홉 시 정각에 오도록 노력해 봐라 짜식아.
윽, 신경쓰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확실히 기억해두고 있던 모양이다. 처음 본 조교한테 말을 놓을 정도로 친근한 동네 아저씨 혹은 할아버지같은 외향에 잠깐 혼이 빠졌나 보다. 본질은 교수님이란 것을 기억해야 한다. 1년동안 얼굴 맞대고 살아야 한다는 것도.
불안하단 듯 가방을 붙들고 체교과 강의실을 찾아 다녔다. 얼핏 오늘은 이론 수업이라 들은 듯 해서 생각한 것이었지만, 혹시 틀리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다행히 물어물어 강의실을 찾아오긴 했다마는 다짜고짜 찾아가서 어쩔까 싶기도 하고. 도착하자 마자 문이 열리며 덩치 큰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남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여자들도 섞여있는 걸로 봐선 여긴 남녀성비가 꽤 맞는가 보다. 대체로 몸이 좋고 키가 큰 학생들이 많다 보니 새빠지게 목을 내밀고 그 사람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행렬이 거의 끝나가는데도 그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자 초조하게 지나간 무리들도 다시 바라보았다.
저 사람인가? 아니야. 그 사람은 키가 좀 더 컸어. 어? 저 사람인가? 아닌데.. 저 사람은 머리카락이 더 검은색에 가까워. 불안한 눈으로 사람들을 하나씩 제외시켜 나가다 보니 어느새 문을 빠져나가는 학생들이 없는 지경이 되었다. 생각해 보니 살짝 쪽팔리긴 했다. 학생들 입장에선 웬 키 큰 낯선 사람이 강의실 앞에서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셈일 테니까.
여길 온 것을 후회하며 포기하고 집에 가려는 찰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눈 속을 메웠다. 모자를 벗어서인지, 적당히 단정하면서도 살짝 뻗혀있는 머리카락이 폭신폭신하니 만져보고 싶게 생겼다. 멍하니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지나쳐 가려는 남자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 아앗! 하는 멍청한 목소리는 덤이었다.
손목은 생각보다 두껍지 않았다. 오히려 팔뚝에 비해 얇은 편이었지. 갑자기 잡은 것에 자신이 더 놀랐는지 광수의 눈이 커졌다. 물론 남자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광수를 바라보았고, 그 결과 머리 하나 정도의 차이 사이로 시선이 맞물렸다.
남자의 눈은 검은색과 갈색의 중간선이었다. 놀랐다기보단 당황과 흥미의 기색이 엿보였지만, 광수는 미안함에 어쩔 줄 모르며 손목을 놓았을 뿐이다. 미쳤지, 진짜. 하루 안에 같은 사람과 부딛히고 갑자기 붙잡히는 것은 딱히 유쾌한 기분이 아닐 터였다. 그건 눈치가 빠르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광수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 쪽이었다. 우물쭈물 거리는 광수를 대신해 남자가 입을 열었다.
뭔가 볼일이라도 있나요?
아니... 저기, 그.
머릿속으로 남자에게 할 사괏말이 핑핑 돌고 있었지만 빠끔거리는 입 너머로는 아무런 말도 나오고 있지 않았다. 생각보다.. 남자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요소를 더 갖추고 있다는 게 큰 이유였다. 짙고 곧은 눈썹이라던가, 도톰하고 색소가 옅은 입술 따위의 하찮지만 중요한 이유. 남자는 친절하게도 광수의 입 속에서 나오는 말을 기다려 주었다.
저....
네, 말씀 하세요.
젓, 저랑 밥 한번 드실랫. 래요??
아차. 망했다. 광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난데없이 커피에서 밥으로 진화한 걸로 모자라 말도 더듬고, 심지어 뒷부분에선 삑사리까지 났다. 앞의 남자가 얼마나 우습게 볼까? 얼굴이 절로 붉게 물들었다. 광수는 빠르게 변명을 붙여가기 시작했다.
아, 아니. 아까 부딛힌 사람인데요, 저는 이광수라고 하고요.. 밥 시간이잖아요! 커피보단 밥이 나을 것 같고 염치없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해서... 무턱대고 찾아와서 죄송한데 저.. 저 이 근처 맛집 많이 알아요! 제가 소개시켜 드릴게요!
음.. 그렇구나. 제 이름은 김종국이라 합니다.
그리고 저.. 아침에 폐 끼친 게 죄송해서요! 이번에 새로 부임한 조교인데 이른 아침부터 변 당하셨죠? 그보다 눈이 참 예쁘, 헉.
눈이요?
눈 이 아니라 누-운 이요! 하늘에서 내리는 눈 말하는 거예요. 절대로 그런 사심 가득한 말은 아니고요.
지금 봄인데..
자신을 종국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그저 웃으며 경청해줄 뿐이었다. 웃을 때마다 얼핏 보이는 보조개가 비수가 된 듯 가슴에 꼿혔다.
아무튼... 학생에게 그러려는 의도는 없었어요. 미안해요.
......으음, 네.
종국은 살짝 당황한 듯 보였다. 하지만 조금 고민하는가 싶더니, 잠시간의 간극 후엔 외려 빙긋이 웃는 얼굴로 답했다. 약간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 같아 광수는 의아하면서도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말 놓으셔도 돼요. 저는 서른 살입니다.
아, 제가 조금 더 나이가 많네요. 그럼 광수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요?
네? 앗, 네.
알았어. 잘 부탁해, 광수야.
긴가민가 했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는 확답을 받으니 살짝 놀랐다. 요즘은 재수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가능한 일이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어 놀라움은 오래 가지 않았지만. 오히려 나이를 대강 알고 나니 듬직한 느낌과 더불어 동안이라는 생각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운동을 해서 그런가?
네! 그럼 저는 종국이 형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래. 그럼 밥 먹으러 갈까?
...네?
사준다며?
아... 앗!!! 네!
웃으며 앞장서는 종국의 뒤로 광수가 졸졸 따라가는 것을 캠퍼스 내의 사람들은 기이한 듯 바라보았다. 물론 둘만 그 시선을 몰랐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야.
왜 불러, 새꺄.
종국이 형은 천사인 것 같아.
뭐? 종 누구?
종국과 함께 한 식사는 말할 것도 없이 좋았다. 대학 근처의 돈가스집에 갔는데, 돈가스를 자르다가 떨려서 접시에다 칼질을 했다는 것 빼고는 실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대화를 많이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더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형의 담담한 말투, 칼질을 하던 남자답게 예쁜 손, 눈 쪽으로 살짝 흘러내린 머리카락, 잦은 간격으로 움직이던 볼... 모든 것이 완벽했다. 물론 긴장해서인지 주로 자신이 쓸모없는 tmi를 남발하고 종국은 그걸 들으며 리액션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솔직히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던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물론 점심시간이 끝나자 형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광수는 나름 만족했다. 손에 들려있는 폰 화면엔 '종국이 형♡' 이라고 써 있었다. 정신 나간 듯이 실실 웃는 광수를, 대학 동창이자 구토를 쏟아부은 장본인인 그의 친구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 자식이, 갑자기 보자 해서 나왔더니 날 앞에 두고 헛소리만 지껄이고 있잖아? 못마땅하지만 자신이 한 짓이 있어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광수의 친구가 다시금 말을 걸었다.
너 뭐냐? 어저께만 해도 세탁비 내놓으라고 살벌하게 화냈잖아.
그건 니가 잘못한 거고.
.... 아무튼, 너 며칠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나 드디어 운명을 발견한 것 같다.
헛소리 좀 그만 하고.
아니, 이번엔 진짜야!
광수가 핸드폰을 보여주며 말했다. 물론 이렇게 커밍아웃을 하는 건 일반적으로 불가한 일이었지만,
뭐냐. 종국이... 형?
어.
잘생겼냐?
어.
니 기준을 내가 알아야 뭐라도 그 분한테 말해드리는데... 광수한테서 도망가시라고.
죽을래?
이미 광수와 깔 데까지 다 까버린 불ㅇ, 아니. 단짝친구는 흥미가 섞인 눈으로 광수의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쓸데없는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남자던 여자던 쉽게 사랑에 빠지진 않았지만, 한 번 제대로 빠지면 간이나 쓸개나 다 빼주곤 했던 광수의 모습이 친구의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광수의 호의가 다시 돌아왔던 건 딱 한 번 뿐이었으니까. 이 호구 자식이 또 누구한테 상처 받으려고 작정했나? 대학원 진학한 후 몇 년은 연애 끊은 것 같던데. 친구가 옆에서 불신의 눈으로 보건 말건 광수는 행복할 뿐이었다.
근데 나 그 종국이 형이란 사람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누구더라?
네가 형을 어떻게 알아, 대학생인데.
뭐? 니가 미쳤구나. 하다하다 대학원생이 대학생한테 손을 대?
형이라니까.
아. 재수하셨어? 난 또..
아까부터 형이라 했거든?
머쓱하게 화를 거둔 광수의 친구는 이질감에 자신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분명 낯익은 이름인데.. 그럴 리가 없지만 정말 아는 사람 같았다. 바로 떠오르는 걸로 봐서 친한 사람은 아니었겠지만 아무래도 이상하고 찜찜했다. 혹시 범죄잔가? 뉴스에서 본 거 아냐? 하는 근거없는 추측까지 맴돌 때, 광수가 폰을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을 했다.
야, 니가 전에 나 연애할 때 도와준다 했지? 나 좀 도와주라.
뭐? 싫어! 니가 얼마나 개복치같은 연애를 할지 안 봐도 뻔한데?
세탁비 낼래?
내가 그런다고.. ......뭘 도와주면 되는데?
자본주의에 굴복해 버린 광수의 친구는 눈물을 삼키며 다가올 앞날을 걱정했다. 질질 짜는 친구놈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던 지난날이 파노라마처럼 앞에 펼쳐졌다. ...당분간 평온하게 지내긴 글렀구만. 광수의 친구는 불안한 예감을 뒤로 밀어버리며 커피만 쪽쪽 빨아댔다.
광수가 종국과 알고 지낸지 몇 달이나 지난 어느 날이었다. 조교 일과 공부를 병행하다 보니 말라 죽어가고 있었지만 광수는 나름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내가 나중에.. 나중에 꼭 고백하고 만다. 하루일과를 끝내고 힘 빠진 해삼처럼 자취방 현관을 쓸며 기어 돌아올 때, 매일같이 되뇌는 말이었다. ...진 않지만, 아무튼 이루어지면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에서 우러난 말이었다. 게다가, 광수와 종국은 약 3달의 기간동안 부쩍 친해졌다. 여러 번 만났고, 동선이 많이 겹치는 일은 없었지만 만날 때마다 서로 인사하며 지냈다. 가끔 술잔을 기울이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하는 사이 정도로 발전했다는 말이다.
¹형, 오늘 시간 돼요? 술 마시러 갈래요?
¹ ■■대학 사거리에 있는 포차요!
지금 시각은 8시. ..너무 과한 것 아닐까? 시간도 애매하고, 여태껏 술을 마셨던 것도 고깃집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단 둘이 가는 경우도 손에 꼽았다. 포차가 잘못된 건 아니지만, 세 명은 모아서 간다고 했어야 했나? 어색해하며 거절하면 어쩌지? 애초에 형이 오늘 시간 없다고 거절하면 어쩌려고. 흐늘거리는 몸을 힘겹게 소파에 얹은 광수가 종국에게 보낸 메세지였다. 지울까 싶어 메세지를 꾸욱 누를 때, 1이 사라지며 답장이 왔다.
그럼 거기서 9시에 만날까?
광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광수야, 괜찮아?
걱정하는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대로라면 기분 좋아하며 칠렐레 팔렐레 웃어야 쓰겠지만, 울렁거리는 뱃속이 신경쓰여 진짜 비명을 지르기 직전이었다. 눈 앞이 핑 돌았다. 남자 둘이 가볍게 만났는데 소주 6병이 말이 되는가? 둘이 같이 마셨는데 혼자 취한 것이 무척 자존심 상했다. 심지어 형이 네 병을 마셨다. 미친 거 아냐? 메슥거리는 배를 부여잡으며 광수는 취기를 물리치려 노력했다. 홧홧한 얼굴이 상에 닿자 그나마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 때, 광수의 앞에서 종국이 뭐라고 하는 게 보였다. 아마도 계산을 하는 것 같았다. 카드를 꺼내고 계산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첫만남 때 빼고 만났을 때의 모든 음식값은 종국이 부담했었다. 사람들한테 베푸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는 사람인 듯 했다. 광수가 시뻘건 얼굴로 누워있는 걸 보며 종국은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광수를 일으키며 달래는 게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휘청거리는 성인 남성을 혼자 부축하는 것은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니었지만, 종국은 아무렇지도 않게 광수를 들쳐업듯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광수야, 일어나. 아무리 오늘 날씨가 따뜻해도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간다? 빨리.
종국이 형...
오냐 녀석아, 나다. 이제 집에 가야지.
투박하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끄응, 차. 광수를 부축하고 열심히 발을 내딛는 종국이었다. 다행히 번화가 쪽은 더 뒤에 있어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내일 광수가 쪽팔려할 일이 생길 수 있으니 최대한 그럴 가능성을 없애 주자는 게 그 나름대로의 배려심 넘치는 행동이었지만, 이미 취한 광수는 인사불정이었다. 종국은 포차에서 나와 사거리를 향해 걸어갔다. 왜인지 모르게 내딛는 걸음마다 익숙함이 줄줄 묻어났다. 어느 정도 왔을까, 잠깐 쉬려는 듯 가로등 밑에서 종국은 멈추어 섰다. 고개를 돌리자 마자 보이는, 반쯤 졸고 있는 광수를 보며 살짝 웃었다. 확실히 어린 티가 나는 얼굴이었기에.
사실 종국은 교수였다. 학교 내에선 그나마 젊은 축에 속하는 교수. 서른 여섯이란 나이에 대학교 교수직을 따냈고, 서른 아홉이 된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는. 친근한 말투와 상냥한 성격,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 등으로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다. 광수가 아직까지 모른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그는 학교 내에서 꽤나 인지도가 높은 교수 중 하나였다.
광수와의 첫만남은 그야말로 황당했다. 그 날의 종국은 전날까지 수업 자료를 찾아보고 강의를 준비하느라 지친 상태였다. 강의도 없는 김에 운동이나 할까 싶어 11호관을 찾아 캠퍼스를 돌아다니는데, 저 멀리서 큼직한 무언가가 피할 새도 없이 자신을 들이받은 것이다. 종국이 덩치가 작은 편이 아닌데도 벌렁 넘어가 버린 것이 충격적이었다. 컨디션 난조와 갑작스런 상황에 대한 적절한 당황 탓이었을 것이다. 놀란 듯 소리를 지르는 걸 봐선 고의성은 없었던 것 같은데, 너무 똑바로 달려오는 바람에 자칫 오해가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얼굴을 보자 마음이 풀릴 수밖에 없었다. 다 큰 성인 남성에게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혼나고 눈치 보는 대형견같은 느낌이었다. 그것도 잠시, 뭐라뭐라 중얼거리고 가버렸지만. 말이 너무 흔들리는 바람에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아무튼, 그 후에 다가온 광수는 그렇게 나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연상에게 깍듯하고 일 처리가 잘 되는 사람으로, 석진이 형한테서 데려와 자신의 조교로 삼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종국을 학생으로 오해하긴 했지만 오해를 풀어줄 용의는 없었다. 서른 아홉보다 적게 보고 있는 것 같아 기분 좋기도 하고, 순둥순둥하게 구는 것이 재밌기도 해서. 이른 바 장난이라는 녀석이다.
으음, 형..
광수야. 안 어지러워?
네. 저 괜찮아요...
말과는 다르게 아직도 비틀거렸기에 종국이 붙잡고 있어야 했지만, 광수는 자기가 안 취했다고 주장했다. 술 취한 사람들이 으레 그러듯이 말이다. 종국이 다시금 입을 열려던 찰나, 광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얼굴은 빨갰고 눈엔 초점이 없었으나 분명 종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
...
형.
...
저 형 좋아해요.
형이 절 좋아하는진 모르겠어요, 형에게 제가 잘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그래도 제가 많이 좋아해요.
그건 확실해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종국의 표정은 광수에겐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놀란 얼굴이었다. 살짝 입을 벌리고 위를 올려다보는 종국에게 광수는 입을 맞췄다. 용기가 없어서 짧은 입맞춤으로 끝났지만, 분명 입맞춤이었다. 단 내는 나지 않았다, 입에선 씁쓸한 향이 났다.
입술이 떨어지자 광수의 몸이 휘청이더니 고꾸라졌다. 검게 물드는 시야 한가운데 자신을 안아주고 있는 종국이 보였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종국은 광수를 택시에 태워 집으로 보내며 -재밌게도 광수는 술술 자신의 집 주소를 불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나는 광수를 좋아하는가? 잘 모르겠다. 나는 광수에게 잘 대해주는가? 그렇다. 하지만 난 모든 동생들에게 잘해 주고, 모든 동생을 예뻐한다. 그럼 질문을 바꿔 보자, 난 광수를 특별히 대해주는가? ...잘 모르겠다.
특별히 대해주지 않았다고 시원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동생에게 무언가를 얻어먹은 것도 광수가 처음이었고, 나이와 신분을 속이는 -엄연히 말하면 속인 건 아니지만- 장난을 한 것도 광수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광수와 있을 땐 왜인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자연스럽게 밴 매너도, 공손한 태도도, 순하게 휘어지는 눈꼬리와 잘 웃는 성격도 마음에 들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일 때면 살짝 마음이 불편해졌고, 메세지를 먼저 보내는 일도 늘기 시작했다. 뭐 해? 혹은 지금 어디야? , 딸기 좋아해? 등 소모적인 질문이나 쓸모없는 질문을 하고, 답장을 받을 때마다 입가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한 번도 설레지 않았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지?
종국은 광수가 일어난 후 제대로 얘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과가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놓치지는 말아야 겠다고 다짐한 건은 덤이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