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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서서보면

w. 스타

늦은 밤 서늘한 바람이 파카 안으로 살금살금 기어들어오는 서린 날이었다. 저벅저벅. 다리를 다치기라도 한 듯이 절면서 걷는 남자의 그림자. 일을 막 끝낸 종국은 가까운 거리를 굳이 차를 타고 가기 싫었기에 걷기로 했던 선택을 조금 후회했다. 혹시라도 바람을 좀 더 막을 수 있을까 봐 파카를 좀 더 끌어당겨보지만 이미 뼛속까지 찬 기운이 닿아 필요 없는 행위였다. 마스크 안에 높은 코는 어언 빨갛게 무르익었을 것이다.

 

 

그토록 추운 날. 횡단보도 앞 사거리에 못 보던 할머니 한 분이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는 모습이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잘 익은 귤이 빨간 바구니 안에 듬뿍 쌓여있는 모습을 보니 참... 맛있게도 생겼다. 파란불이 켜졌으나 종국은 건너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덩치 큰 사내가 노인네에게 부는 바람을 막아주듯이 벽처럼 그렇게 서있었다.

 

“만 원어치만 주세요. ”

 

지갑을 꺼낸 종국은 때마침 가죽을 빵빵하게 채운 돈뭉치를 발견했다.

 

 

“ 아니 그냥 여기 있는 거 다 주세요. ”

 

70은 넘으셨을 나이 드신 분이 헝겊을 귀를 감싸 둘러맨 체 추운 날씨를 견디고 있는 걸 보니 문득 아버지가 생각났다. 종종 노점상의 채소를 잔뜩 사 와서 어머니를 애먹였던 아버지.

 

“ 진짜? 고마워~ 복받을 거야. ”

 

봉투를 주섬주섬 꺼내며 할머니는 차곡차곡 과일들을 넣어주셨다. 혼자 먹기엔 양이 많으나 아는 동생들에게 나눠주면 금방일 것이다. 이상하게도 봉지를 넘겨받으면서 맞닿은 손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에도 오래 신었던 신발이 시려 동동 구르는 종국과 달리 할머님은 차분하게만 보였다.

 

“ 추우신데 들어가서 쉬세요 할머니 ”

 

“ 총감 잠깐만 있어봐. ”

 

살갑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가려는 종국을 늙고 거친 목소리가 불러 세웠다. 조그만 가방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어 종국이 들고 있던 비닐에 넣어버린다.

 

“선물 받은 건데 가져. 자네같이 착한 총각은 오랜만에 봐. ”

 

“ 아니.. 아니에요 어르신. ”

 

***

“ 이게 뭐더라. 누구한테 받았지. 웃기는 게 다 있네. ”

 

 

대청소를 다 끝낸 종국은 테이블 위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있는 잡동사니를 관찰하듯 만지작거렸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케이스를 열어보니 비싸 보이는 만년필이 꽂혀있었고 그 위로 고급 용지 3개가 나불나불 떨어져 내린다.

 

“ 인생을 다시 쓰라고? ”

 

고급진 무늬와 ‘인생을 다시 쓰세요’라는 문구는 금색 빛을 자랑했다. 또한 돌려본 뒷장에 친절하게 사용법까지 설명해 준다.

 

*살면서 후회했던 선택이 있다면 다시 써보세요

*같이 드린 만년필로 쓰셔야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운명의 가지를 다시 타게 되는 것일 뿐, 당신의 과거에 선택할 수 없는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꽤 구체적인 방법에 종국은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재밌는 장난이라면 재밌긴 했으나, 참으로 허무맹랑하고 요술램프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들어줄 거면 통 크게 해줄 것이지 요구 조건도 많다...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이런 장난 같은 편지를 남겼담. 종국은 그렇게 시답지 않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 남자는 그날따라 심심했다. 살면서 후회한 일을 고민해보라는 교훈적인 의미든지, 단순한 놀림이든지 상관없었다. 책상을 톡톡 두드리던 종국은 머리를 넘기고는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단 1분의 시간을 낭비하는 유흥거리에 부담은 없었다.

 

-터보때 ... 지금 봐도 부끄럽지 않은 스타일로... 해주세요...

 

어쩌면 그답지 않은 이소원은 어제 런닝맨 촬영에서 있던 일 때문이다. 요즘 따라 열일하는 작가들은 기어코 기억 너머에 보관해둔 레게머리 시절을 TV만 한 크기의 사진으로 뽑아왔더랬다. 멤버들이 어찌나 놀리던지 종국은 얼굴이 빨개져서 노발대발하였고. 그 반응이 웃긴 탓에 SNS까지 짤이 돈 터였다. 그 사진만 보면 터보 시절 자료들을 몽땅 삭제해버리고 싶었던 종국인지라 진심을 다해 그렇게 적었다.

 

“ 풋.”

 

불현듯 나온 헛웃음은 콧방귀에 담겨 공기 중에 흩어졌다.

 

“이게 뭐냐 증말. 하.. 그만하자. 뭐 볼 거 없나. ”

 

관찰카메라 때문에 혼잣말하는 버릇이 생긴 남자가 중얼거리다가 별 일없이 TV를 켰다.

소원이 담긴 쪽지가 케이스에 들어가 금방 암전 안에 묻혔다.

 

.

.

.

 

 

깜빡 잠이 들었나? 커다란 덩치가 찌뿌둥하게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창문밖에는 어느새 해가 뜨는지 어두운 장막이 옅어지고 있었다. TV는 여전히 켜진 상태로 런닝맨 재방송이 한참이다.

 

- 국종이처럼 입고 다니면 얼마나 좋아.

 

- 야 너만 연예인이냐?

 

-왜 그래요 또

 

부은 얼굴이 먹이를 찾는 강아지처럼 좌우로 번갈아 돌아가다가, 스피커에서 제 이름이 나오자 그제야 한곳을 바라보았다. 브라운관 너머의 자신은 셔츠에 가디건, 청바지 구두까지 신고 마치 모델처럼 입고 있었다. 예능에서 듣기 힘들다던 재석이 형의 칭찬을 들을 만도 했다. 너목보도 아니고 특집도 아닌데 런닝맨에 저렇게 입고 간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다듬어보니 스타일리스트가 챙겨준 옷을 별 말없이 입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저 머리를 박박 긁으며 일어나는 종국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느낀 건 샤워를 다 마친 후 소파에 널린 옷 중 하나를 찾으러 갔을 때였다. 깨끗하게 비워진 소파 위에 애꿎은 강아지 인형이라도 들춰보고 멍하니 자리에 섰다.

 

투벅투벅투벅. 곧이어 후딱 잠이 깬 종국은 강아지 인형을 자연스럽게 들쳐멘 채로 즉시 옷방으로 향했다. 설마... 자는 사이에 검은 옷들을 다 갖다 버려야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던 어머니나 팬들이 왔다 가기라도 했을까. 아니면 밤새 요정이 선물이라도 두고 갔을까.

 

방안에는 기다란 링거에 빼곡히 각양각색의 옷들이 정리되어서 걸려있었다. 분홍색 하늘색 연보라색 청색 등등 이렇게 많이 샀을 리가 없는데, 물론 저 구석 자리에 안착한 검정색 무리도 있긴 하였다만. 그마저도 평소 즐겨 입었던 츄리닝, 나시, 빈티지 옷들이 아닌 셔츠, 자켓, 후드티 같은 종류의 옷들이었다. 더 희한한 건 보다 보니 스펀지에 물감이 스며들듯 이런 스타일도 취향 같아 납득이 되는 것이었다.

 

그중, 절대 제 손으로 사지 않았을 것 같은 댄디한 분홍남방에 저절로 손이 갔다. 그러자 무려 아울렛에 가서 옷을 고르던 제 손이 뇌리에 스쳐 지나간다. 비디오 필름처럼 재생되는 것은 분명 자신의 기억이었다.

 

“ 어? 아. 맞다... 이것도 이것도 ... 내가 산거 맞네 증말... 이거 다. ”

 

영상처럼 여러 기억이 재구성되어 되감기 되는 기분에 머리가 지끈 아프더니 다시 뇌 속이 표백된 마냥 멍해진다.

 

 

***

 

 

“ 안녕하세요. 오빠. ”

 

“ 어 그래 수고해. "

 

자신에게 인사하는 스텝들이 잘생긴 게스트라도 본 듯이 발그레해서 수줍게 호의를 표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한창 잘나갈 때야 없던 경험은 아니었다만, 그도 이제 40대 후반이었다. 현관 앞을 나서자 생일도 아닌데 팬들이 보낸 팬레터와 선물들이 잔뜩 쌓여있을 때부터 늘 가던 길인데 몰래 사진을 찍는 사람들까지. 다시 30대 초반의 스타가 된 기분을 느끼는 것은 속이 간지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패션의 선두주자라니 해탈함으로 살아온 인생에서 다시없을 별명이라고 종국은 생각했다. 무릇 20년 전에 지금 봐도 부끄럽지 않은 패션이란 종국이 생각한 무난무난한 스타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 당시엔 혁명적인 스타일로 그의 이미지를 확 바꿔놔 버렸다. 더욱이 기대에 부흥해야 하는 성격 탓에 30대 40대까지 명목을 이어가야 했음을 초록창에 가득한 ‘패셔니스타’ 라는 기사 제목을 보고야 알 수 있었다. 오늘의 종국 또한 가볍게 대충 입고 갔다가( 사실 평소보다는 신경 쓰고 입고 갔다) 못 보던 얼굴의 스타일리스트에게 이게 무슨 일이냐는 잔소리만 챙겨 듣고 스타일리스트가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은 참이었다.

 

‘ 그러면 ... 진짜 이루어진 거란 말이네…? 하아.. ’

 

뭐 현실까지 이런 식으로 영향이 가는 건 원하지 않았지만, 그런 종이 쪼가리에 적은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건 몹시 대단히 기껍고 놀랄 방향이었다. 촬영 대기실에 앉아 무려 3명이 스타일리스트에게 머리며 화장이며 케어를 받고 있던 종국은 유튜브를 쭉 내리며 생각했다. 유튜브에 검색해본 그의 터보영상은 썸네일부터가 지금의 아이돌들과 비교해도 튀지도 않지만 모나지도 않은 헤어와 메이크업이었다. 그 시절에 이 정도 패션이면 확실히 선두주자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화질은 어떻게 할 수 없었으나 종국은 어릴 적 자신의 외모가 신기하기만 했다.

 

뭐야 잘생겼네.

 

 

 

항상 못생긴 그룹이라고 불리며 쌍꺼풀 수술을 들먹이고 성형을 권유하던 사장의 목소리가 점차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을 느끼자 종국은 어깨가 으쓱해지는 흐뭇함을 느꼈다. 왜인지 가슴 안에 헬륨가스를 가득 채운 듯 기분이 붕 떠 있었다. 눈썹화장을 하고 헤어 드라이를 하는 지금 이순간이 귀찮기는커녕 늘 있는 일인 것처럼 편한 느낌도 들어서 스스로가 낯설었다.

 

“ 형은 형을 진짜 사랑하나 봐요. ”

 

“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

 

“ 아까부터 자기 얼굴 보면서 실실 웃고 있잖아요? "

 

먼저 세팅한 뒤 종국의 뒤를 돌아 나온 하하가 풀썩 옆에 앉아 자신이 먹고 있던 과자를 권했다. 다만 종국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 부럽다 부러워. 20대는 대한민국 대표 아이돌에 30대는 국민 남친이고, 40대는 꽃중년이라니 나도 그런 인생 한번 살고 싶다. ”

 

“ 누가? 이번 게스트가? ”

 

" 아이씨 형 말하는 거잖아. 지금 내 옆에서 관리받고있는 김종국! “

 

동훈은 종국의 앞머리를 땅콩을 때리는 척 살짝 건드려본다. 어이없는 미소를 띄운 종국이 그저 거울만 가만히 바라보았다.

 

 

“ 아이돌은 무슨... 누가 들으면 재수없다해 인마. ”

 

“ 아이돌이지. 터보 아니에요 터보. 이번에 오는 게스트도 터보때 형 팬이었다는데. ”

 

“ 그런 건 어디서 듣냐.

 

“ 형이 내 자랑인데 알아야지. 형은 그 얼굴에 조금 뽐내고 다녀도 돼요. ”

 

소원이 이루어지기 전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기에 소원이라는 거창함에 비해 크게 변한 건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확실히 변한 것 같았다.

 

“ 그런가. 그래 나 정도면 잘생겼지. ”

 

***

 

 

종국은 콧노래를 부르며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가지런히 벗겨놓았다. 아무도 없는 어둑어둑한 집안에 불이 켜지자마자 종국은 테이블 밑에 넣어뒀던 볼펜 케이스를 먼저 찾았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책상 위에 쟁여둔다.

 

오늘 하루는 기분이 정말 새로웠다. 27년 연예계 생활을 했으나 이렇게 하루 종일 칭찬과 호를 받은 적은 드물었다... 아니 사실 드문 건 아니었는데 받아들이는 감정의 문이 달랐다. 가스라이팅과 다름없던 터보시절 사장의 기분 나쁜 기억들이 팬들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사장님의 모습으로 바뀌고 있는 덕분이다. 이제는 남들이 해주는 말이 그저 연예인이니까 편의상 해주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 내일은 무슨 옷을 입고 갈까~ ”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종국이 중얼거렸다. 패션을 고민하는 것이 피곤한 숙제가 아니라 하나의 재미로 느껴졌다. 이윽고 옷을 벗은 짙은 손이 다시 까만 케이스를 향했다. 이내 케이스를 열어 소원종이가 문득 2장만 남아있는 것을 확인했을 때 정지버튼을 누른 듯이 종국의 콧노래가 뚝 끊겼다. 소원이라니... 장난처럼 적은 한마디가 정말로 이루어졌음에 닭살이 돋을 정도로 전율이 돌았다. 그의 손안에 당첨될 게 확실한 복권과 같이 폭탄이 들려있는 기분이었다.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어쩌면 정말 커다란 기회가 될 수도 절망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종국은 스스로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은 인생에서 딱 한 가지 후회하는 일이 있었다. 커리어 최전성기에 툭 끊기고 온갖 욕을 먹었던 기억이 가슴 언저리에 항상 응어리져서 남아있었다.

 

그리고 고민하던 남자는 펜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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